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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공직자의 경제이야기] 개인의 삶, 국가의 삶이 모두 묻어있는 경제이야기

다락귀신 2018. 6. 13. 12:55

한 공직자의 경제이야기. 2017. 엄낙용 저


0. 들어가기에 앞서


이 책의 저자는 1970년 현재의 행정고시인 사무관(재경직) 공채시험에 합격하여 관세청에서 일하기 시작한 이래로 각종 경제부처에서의 30년간의 공직생활, 그리고 15년 간의 교직생활을 마친 인물이다. 70년부터 2010년대에 이르는 한국 경제발전의 역사를 함께 살아낸 저자가 풀어내는 경제이야기는 경제 이전에 하나의 역사수업을 듣고 있는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그러면서 그 역사 속에서 독자들은 경제가 만들어지고 변해가는 흐름,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느꼈던 저자의 각종 경험, 감정 등을 따라가며 개념 간을 이어주는 맥락을 한 번쯤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이렇게 저자 개인의 경제사를 훑은 뒤 다음 장에서 맞이하게 되는 경제학 개념들은 이론서에서 보던 것과는 사뭇 다른 생동감으로 다가온다. 


이 책은 경제 전반에 대한 개론서라기보단 지침서다. 저자는 자신이 공직생활을 통해 가졌던 신념과 실재를 언급하고 또 개인의 단상을 덧붙인 경제학의 개념을 소개한다. 삶은 속력이 아닌 방향이라는 말이 있듯, 나는 가르침 또한 지식의 전달을 넘어 그 지식을 대하는 태도까지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경제학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지식을 대하는 태도, 견해 등을 모두 담은 지침서이다. 대한민국의 경제사를 읽고, 우리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 속에 어떤 경제적 개념이 적용되었는지, 그 시기에 그 개념을 적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를 살피는 과정은, 이 책을 읽는 이들의 시야를 조금 더 넓혀주는 경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서평에서는 책의 뒤편에 언급되는 경제적 개념에 대한 요약, 정리보다는 책 전반의 흐름과, 전반부에 나오는 저자의 경험에 대한 감상에 집중할 것이다.



1. 개인의 경제사


앞서 이야기했듯, 이 책의 1장은 엄낙용이란 <공직의 길>이란 이름 아래 정리된 저자 개인의 경제사이다. 이 장을 통해서 독자들은 한국의 경제가 어떻게 발전하고, 어떤 위기를 겪으며 지금에 이르렀는지, 그 과정에서 한국 사회는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접할 수 있다.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고 했던가. "한강의 기적"이라 불렸던 시기를 살아낸 저자의 공직생활은 다사다난 그 자체이다. 신비한 출생만 없다 뿐이지 난관의 봉착과 개인의 기지를 살린 극복 등으로 이어지는 까닭에 단순한 역사라기보다는 일견 영웅신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래는 그 경험 중 하나이다. 


 "한국은 1967년 GATT 가입을 위한 협상과정에 당시 한국경제의 낙후성과 만성적 국제수지 적자에 대한 다른 국가의 배려로 비교적 관대하게 이 조항을 근거로 한 수입제한조치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경제의 급속한 성장과 수출증가로 인하여 다른 국가들이 한국에 더는 이러한 예외조치를 허용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확산하는 터에 1986년부터 한국은 대규모의 무역흑자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모든 GATT 체약국과 GATT 사무국 역시 한국의 국제수지 예외조항의 졸업을 기정사실로 한 상황에서 국제수지위원회가 예정된 것이다. 

필자가 한국에서 출발할 즈음에는 본국에서도 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 가장 중요한 협상상대인 미국대표와 유럽공동체 대표를 방문했다. 두 군데 모두 한국이 즉시 무조건 국제수지조항을 졸업하고 정상적인 수입자유화 의무를 졸업하고 정상적인 수입자유화 의무를 부담해야 한다며 더는 논의가 필요 없다는 분위기였다. (...)이어 GATT 사무국을 방문했다. 사무국 측도 한국의 국제 수지조항 졸업은 당연한 일이며 한국이 이렇게 오랜 기간에 걸쳐 국제수지 예외조항을 인용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고 하면서 필자의 투지에 찬물을 끼얹는 언사를 늘어놓았다. (...) 필자는 한국 측에 도움이 되는 규정이 무엇인지 가르쳐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사무국 인사는 흠칫하는 표정을 지으며 사무국은 당사국들의 협상에 영향을 미치는 행동이 금지되어있다고 답변하는 것이었다. 이에 필자는 어떤 관련된 문서가 있는 것이 확실하다는 심증을 갖고 GATT의 모든 규정집을 며칠에 걸쳐 뒤지기 시작했다. 결국, 한국이 GATT에 가입하기 이전에 만들어진 오래된 문서 중 국제 수지조항을 졸업하는 국가는 당사국과의 협의를 거쳐 단계적 수입자유화를 시행해야 한다는 내용의 결정문 기록을 찾는 순간 마치 금맥을 발견한 광부와 같은 희열을 느꼈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제는 선처를 부탁하는 입장이 아니라 당당히 권리에 입각한 단계적 자유화를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과 달리 체계가 잡혀있지 않은 사회 내에서 개인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그들이 어떤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과거를 보는 시각을 조금은 다르게 만들어준다. 인터넷이 없는 사람들에게 정보전달이 느리다고 타박할 수는 없는 것처럼 그 시기 사람들이 갖고있던 현실적 제약과 시대에 대한 이해 없이 단순히 결과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 어떤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혹여 내가 그랬던 것처럼 경제용어가 가득한 저자의 삶이 어렵다면 뒷장부터 이어지는 경제학 파트를 먼저 읽고 돌아와 1장을 읽어도 좋다. 단지 이 책의 저자로서는 경제학 개념들을 배우기 전에 그 경제학 개념들 뒤에 숨어있는 흐름을 먼저 살펴야 한다는 메시지를 글 배치를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넘겨짚어 본다. 



2. 공직자로서의 경제, 정치로서의 경제


그리고 이 책의 저자는 경제학자이기보다는 공직생활을 거쳐 교직에 있었기에 이 책의 독자들은 단순히 경제에 대한 시각 뿐 아니라 공직자로서 겪을 수 있는 고뇌, 정계와 재계 사이의 관계 등 '정치경제(political economy)'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들을 수 있다. 이 책에서도 언급되듯, 서구권에서 경제를 뜻하는 단어 'economy'는 단순히 '가계를 꾸려가는 형편 또는 방도'를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했지만, 아시아권에서 널리 쓰는 경제는 본디 경세제민의 약어로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의미였던 만큼 동양의 경제는 '국가가 개인을 부유하게 하는 목적'의 정치경제(political economy)였기 때문에 경제를 담당하는 부서에서 일하는 것이 정치와 연계되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부가가치세는 과거 자신의 거래내용의 비밀을 유지하기 용이했던 상공인들에게 거래내용을 공개하게 함으로써 단순 부가가치세 납부 뿐 아니라 자신의 소득규모도 밝히게 하는 새로운 세금제도였기 때문에 1977년 도입과정에서 이들의 극심한 저항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독재정권이라는 비난에도 경제발전의 성과로 상공인을 필두로 한 폭넓은 지지기반을 갖고 있던 박정희 정부는 상공인 지지세력의 이탈과 70년대 후반 세계경제 불황의 여파로 한국경제가 침체에 빠지면서 그 지지기반이 약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이 정권은 막을 내린다. 부가가치세 도입으로 인한 지지기반의 이탈을 시해사건과 엮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겠지만 그만큼 경제정책이 정치인의 입지에 큰 영향을 줬던 것은 분명해보인다. 이 책의 저자도 유사하게 영종도에 청소년 수련원, 골프장, 호텔을 지어 국내외 관광객을 유치할 계획이라고 예산을 지원해달라는 청탁을 받는다든지 하는(영종도는 모두가 알고있듯 현재의 인천공항 자리이다.) 것 외에도 어떤 제도의 정비와 시행에 있어 정재계의 압력을 적잖이 받은 경험이 있었고, 그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의 소회와 함께 털어놓는다. 이러한 경험을 읽는 것은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는 야사를 듣는 것처럼 흥미로우면서도, 국가발전 이면의 민낯을 그대로 마주하는 느낌에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 민낯이 부끄럽지만은 않게, 그 속에서도 오롯이 자신의 길을 걸어간 훌륭한 공직자들이 많았음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본인이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마음에 새겼던 한 분의(아직까지도 그 이름을 물어보지 못한 것이 후회라고 한다.) 공무원 관리자과정 강의를 책의 초반부에 소개하고 있는데 나 역시 이 강의에 큰 감명을 받았고, 이 강의가 내가 이 두꺼운 책을 끝까지 읽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단지 공직의 길 뿐 아니라 다른 진로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큰 교훈이 될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해 그 일부를 옮겨본다. 일부만 옮긴다고 해도 다소 글이 길지만 이미 저자가 요약해서 정리해서 적어놓은 글이라 쳐낼 부분을 크게 찾을 수 없어 긴 글을 남긴다.


"여러분이 조선말 매관매직을 하고 수탈을 자행하던 당시 공직자를 만난다면, 어떤 사람이 여러분 앞에 나타날까요? 비인격적이고 흉악함이 겉으로 나타나는 사람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친척 간에 우애가 깊으며 벗 사이에 신망이 높은 고상한 인품을 지니고, 유학에 정통하여 주위 사람으로부터 높임을 받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매관매직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겠지요. 자기를 존경하여 물심양면으로 자신을 섬기는 기특한 사람의 뒤를 받쳐주었을 뿐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공직을 자신의 이름과 함께 가문의 영예를 높이는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가문에서 한 사람이 벼슬, 즉 공직에 나아가면 많은 친족이 그 그늘에서 덕을 보니다. 공직에 나아가는 사람은 이를 돌보는 것을 자신의 후덕함의 표현이라 생각했지요.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끼리끼리 밀어주고 끌어주는 집단도 만들었습니다. 같은 집단에 속한 사람 사이에 의리도 대단했지요. 구성원 각자는 집단을 위해 충성하고, 집단은 하나의 구성원을 위해 모두의 힘을 모았습니다. 다른 집단에게는 배타적이고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지요. 한정된 공직의 기회를 나눌 수 없으니까요.

이러한 공직자에게는 백성이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공직은 나와 내 가문, 그리고 내가 속한 집단에 봉사하기 위한 자리였을 뿐이지요. 이 모든 것이 공권력의 사유화를 의미합니다. 공권력의 사유화란 뇌물을 받거나 무슨 경제적 이득을 추구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공권력을 나의 출세를 위한 기회로, 나의 가문의 영예를 높이는 수단으로, 내가 속한 집단의 권세를 키우기 위하여 기여해야 하는 의무로 생각하는 이 모든 것이 공권력을 사유화하는 행태인 것입니다.

(...)

여러분은 어떤 공직자입니까? 물론 국민을 위해서 봉사하는 일꾼이겠지요. 그러나 동시에 출세도 해야 하고 주변의 사람을 도울 수 있다면 그리도 하고 싶고, 뜻이 맞는 사람끼리 밀어주기도 하고 끌어주기도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도 대부분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전통적인 개인의 미덕이니까요. 

그러나 이러한 개인의 미덕이 공권력을 사유화하고 나라를 빈사 지경으로 만들어버린 조선 말기 공직자의 행태가 시작된 출발점이었다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국민을섬기는 공직자의 길과 공권력을 사유화하는 공직자의 길을 동시에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커다란 오산입니다. 공직의 길은 그처럼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진정 국민을 섬기는 공직자의 길을 가시고 싶다면 제가 몇 가지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여러분이 지금 일하는 자리를 다음에 더 좋은 자리로 옮기기 위한 발판이라고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부여된 직책이 마음에 합한 것이든 아니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국민과 나라를 섬기십시오. 다음에 더 좋은 직책으로 옮겨서 그리하겠다는 생각을 가지면 평생 자신의 출세에만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직무를 수행하다 보면 부당한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자리를 지킬 수 없는 상황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주저 없이 자리를 포기하십시오. 나같이 중요한 사람이 별것도 아닌 일에 자리를 걸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은 항상 부조리한 상황과 타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부당한 사안에는 추호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공직자가 많은 만큼 이 나라와 사회가 바로 서게 될 것입니다. 저는 고직자의 책무에 그만두어야 할 때 바르게 그만두는 것도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공직의 길을 가면서 주변 사람과의 개인적 의리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이는 여러분과 혈연, 지연, 학연 등으로 가까운 사람의 부탁에 편향되지 않는 것은 물론, 여러분을 인정하고 지원해주던 사람에게도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나라와 국민을 최선으로 섬겨야 하는 책무가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만이 여러분이 지켜야 할 가장 큰 의리입니다.

  마지막으로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공직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업무를 수행하면서 주위 사람들과 잘 협조하고 경쟁관계에서 양보하는 원만한 자세를 보이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러분이 이해관계를 함께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이유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소외되고 배척되기 쉽습니다. 여러분에게 호의를 기대하고 접근했던 친지 등으로부터 실망에서 비롯된 적대감을 대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것이 공직의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공권력을 사유화하는 첩경이 될 것입니다.

  조선 말기의 공직자가 나라를 멸망으로 몰아넣고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한 것은 적극적으로 공권력을 사유화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이러한 어려움을 회피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공권력을 사유화하는 공직자가 된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역사에서 보았듯이 욕심에 이끌려서, 또는 의지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공권력을 사유화하는 공직자는 나라와 국민에게 재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길을  온몸으로 저항하고 바른길을 가기 위해 애쓰는 공직자는 나라와 국민에게 커다란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디 여러분에게 부탁하노니 이 나라와 국민에게 복이 되는 공직자가 되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