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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향기. 한병철 저. 2013
0. 들어가기에 앞서
정승환 씨가 노래한 나의 아저씨 ost <보통의 하루> 속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나 말야, 무너지고 있는 것 같아.
겨우 지켜내 왔던 많은 시간들이 사라질까 두려워
(...)
나는 괜찮아 지나갈 거라 여기며 덮어둔 지난 날들
쌓여가다 보니 익숙해져 버린 쉽게 돌이킬 수 없는 날.
그 시작을 잊은 채로 자꾸 멀어지다 보니 말할 수 없게 됐나 봐.
오늘도 보통의 하루가 지나가.
모순적이다. 겨우 지켜내 온 많은 시간들이 사라질까 두렵지만, 그 시간들은
'지나갈 거라 여기며 덮어둔 날이고', '익숙해져버려 돌이킬 수 없고', '시작을 잊은 채로 자꾸 멀어지다 보니 말할 수 없게 된' 그런 '보통의 하루'다. 지켜내야할 시간도 아닌 것 같고, 보통이라기엔 너무나 슬픈 하루다. 하지만 노래는 저 하루가 '보통'이라고 이야기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 노래에 공감한다. 듣고 있자면 울컥한다고, 눈물이 났다고 이야기한다. 아마도 이 처연한 하루가 현대의 '보통의 하루'가 맞는 것 같다.
필자의 주변을 살펴봐도 요새 삶의 의미가 사라졌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혹자는 오늘 죽으나 내년 이맘때 죽으나 내 삶의 의미에는 큰 차이가 없을 것 같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 사람들이 하나같이 정말 열심히 살고 있다는 거다. 하루를 꽉 채워 열심히 살지만 그 끝에 마주하는 것이 무의미함이라니 정말이지 억울할 일이다. 이 책은 그 의미없고 무미건조한 하루에 대한 고찰이다. 어렵지만 친절하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 시간들이 '왜 향기를 잃었는지', '그리고 우리 삶은 왜 향기를 가져야 하는지'. '그 향기를 가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간다.
1. 우리 삶은 왜 향기를 잃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삶의 의미를 잃었는가. 현대인은 바쁠 수 있고, 바빠야 한다고 알고 있고, 실제로 바쁘기 때문이다. 이 바쁨은 시간을 지배하고자 하는 도전의 결과이고, 이 도전은 산업혁명으로부터 시작된다. 산업혁명 이전의 인간은 주어진 질서 속에서 사는 존재였다. 날이 따뜻해지기 시작하면 씨를 뿌려야했고, 곡식이 익으면 거두어야 했으며, 인간은 이러한 불변의 질서 속에 내던져진, 자연의 질서에 따라야 하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계몽주의를 바탕으로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인간은 자연의 질서를 따르는 존재에서, 기술에 의지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존재로 나아간다. 그렇게 기차와, 전화는 물리적 거리를 단축시켰고, 온실기술은 농작물 재배의 시간을 단축시켰다.
인간들은 이것을 신의 피조물에서 신의 복제자로 나아가는 일종의 성장으로 본 듯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는 성장으로 인정받기 위한 성과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야 했다. 이를 위해 사람들이 가장 노력한 것은 '시간의 지배'였다. 기술을 통한 어떤 일을 하는데 걸리는 시간의 절대적인 단축. 끊임없이 자신의 성장을 증명해야 했기 때문에 인간은 더 빨리 더 빨리를 외치는 '조급성'의 신화에 집착했다. 이 '조급성'이 '여기'서 '저기'의 목표에 이르는 '공간적 간격'을 소멸시켰고. 이 간격의 소멸과 함께 '시간의 향기' 또한 사라졌다. 이 과정을 저자는 아래와 같이 서술한다.
"전자 저장 장치나 다른 기술적 가능성은 망각을 초래하는 시간적 간격을 제거한다. 이들은 지나간 것을 순식간에 호출하여 써먹을 수 있게 해준다. 즉각적인 접근이 불가능한 영역이 있어서는 안된다 (...) 간격은 완전한 근접성과 동시성을 수립한다는 목적에 희생된다. 모든 먼 것, 모든 거리는 제거된다. 모든 것을 지금 여기에서 써먹을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즉시성은 정념이 된다."
이러한 이야기는 일견 이상하다. 속도의 증가는 곧 생산성의 증가이고, 이는 더 많은 체험을 위한 시간을 우리에게 줄 것이다. 그리고 기술의 발전에 따라 인간이 일생동안 체험할 수 있는 것들은 더욱 풍성해졌다. 지구로 부족해서 우주까지 넘보고 있는 이러한 풍요 속에서 의미를 상실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반박에 대해 저자는 삶의 '서사'를 이야기한다.
"두 배로 빨리 사는 사람은 두 배로 많은 삶의 가능성을 만끽할 것이다. 삶의 가속화를 통해 삶은 그만큼 배가되고, 이로써 충만한 삶의 목표에 접근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계산은 나이브하며, 충만함과 단순히 꽉 찬 것 사이의 혼동이 빚어낸 결론일 따름이다. 충만한 삶은 그저 양적 논리로 정의되지 않는다. 온갖 삶의 가능성들을 실현한다고 자연히 충만한 삶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 가속화의 테제는 문제의 진정한 핵심을 보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오늘날 삶이 의미 있게 완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완성하고 마무리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오늘의 삶이 분주하고 초조해진 원인이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로이 시작하고 "삶의 가능성들" 사이에서 불안하게 우왕좌왕한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단 하나의 가능성을 완성하고 마무리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의미있는 경험이란 사색의 시간을 거친 사건과 사건 사이의 연결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아무리 귀한 체험의 기회가 많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것을 자신이라는 존재 안에서 고민하고, 재가공해서 '자신만의 이야기'로 묶어내지 못한다면, 단순한 사건들의 체험은 내 안으로 가라앉을 만큼의 무게를 갖지 못한 채 그저 지나칠 뿐이다. 이를 저자는 '시간이 중력을 잃었다.'라고 표현한다. 현대인들은 자신들 앞에 펼쳐진 수많은 사건들이 흘러가는 것을 잡지 못한 채, 그 사건들의 속도에 휘말려 삶이 가속화된다는 막연한 느낌을 받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 휘말림 속에서 삶의 향기는 휘발된다. '아름다움은 지속성에, 사색적 종합에 의존한다. 순간적인 광휘나 자극이 아니라, 사물들의 잔광, 사물들의 여운이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인데, 영화 한 편을 예로 들어보자.
영화 '인턴'은 노인의 매력을 한껏 보여주는 영화다. 이 영화를 아름다움에 대한 이 책의 명제에 대입해보자. 단순히 사건만을 보자면 그저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하는 캐릭터는 젊은 사람들이 가득한 온라인 쇼핑몰 회사에 취직한 늙은 인턴이다. 그 사건 속에서는 '낡음'밖에 묻어져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로버트 드 니로는 평생동안 자신이 지켜왔기에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에티켓이 있고, 업무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가 있다. 그는 단순히 사건과 사건 사이를 살아온 것이 아니라 그 사건들을 엮어 자신의 삶을, 그리고 나아가 자신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냈다. 그렇기에 그 인물 뒤로 묻어나오는 그 유의미하게 연결된 '한 인물의 역사'가 잔광이 되고, 잔향이 되어 '낡음'을 고풍스러움으로 바꿔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체험과 체험의 연결이고, 경험이며, 그 경험이 풍기는 시간의 향기이다.
1-1. 우리 세대를 위한 변명
우선 필자는 30대이고,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상황을 딱 맞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 책을 읽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분명히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삶의 가능성들 사이에서 불안하게 우왕좌왕하는 것은 우리 세대가 잘못해서도, 우리 세대가 못나서도 아니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의미있는 역사의 연속성으로부터 버림받은 세대라고 생각한다.
우리 이전의 세대들은 윗세대에 기대어 자신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었다. 산업혁명 이전의 사회에서는 자연이라는 인간이 바꿀 수 없는 질서가 있었고, 그렇기에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고, 자신의 앞에 놓이는 체험들의 의미를 사색하는 데 있어서 선조들의 경험에 기댈 수 있었다. 산업화 이후에는 질서를 재구축하면서 자연의 질서가 절대적인 진리가 되어주지 못하고, 수많은 체험들이 쏟아졌지만 '가속화'라는 공동의 목적이 있었기에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하나의 방향을 가질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무색무취하지만 고귀한 아버지의 희생이 있었다. 그들은 가속성을 통해 성장을 일궈냈고, 그럴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으로서의 삶의 향기는 잃었을 망정, 그 희생을 통해 이뤄낸 성취가 있다. 어쩌면 그 성취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희생을 통해 가족을 지켜내고 개인의 성공을 이뤄낸' 아버지 세대가 공유한 시간의 강한 향기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아날로그부터 디지털까지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겪어낸 세대다. '가속화는 새로운 질서를 구축한 뒤 그 질서마저 파괴한다'는 이야기처럼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기존에 구축한 질서는 점차 의미를 잃어가고, 우리 윗세대에게 옳은 말이었던 명제들은 우리 세대에 와서는 그 의미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참고할 대상이 없다. 그 와중에 '가속성'을 지향하는 사회 속에서 시대에 뒤떨어져서는 안된다고 배웠다. 우리는 '붉은 여왕의 역설'이 말하듯 최선을 다해 뛰어야 제자리에 서있을 수 있는 존재다. 그렇게 우리는 내 앞에 놓이는 수많은 사건에 대해 고민하고, 나만의 의미로 재창조할 수 있는 사색의 시간을 잃어버렸다. 사건과 사건을 이어붙이고, 하나의 완결된 의미를 만드는 것은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점점 의미를 잃는다. 하나의 사건을 완결하는 데 매달리다가는 다음 연결편을 놓칠지도 모른다. 그래서 언제나 사람들은 새로운 결정을 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가능성을 붙잡으려 애쓰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해지는 개념은 다시 한 번 '가속성'이다. 가속성이 가속성에 박차를 가하는 정말 속도밖에 없는 사회 속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유를, 생각하는 데 쓰는 시간을 개선해야할 대상으로 단정하고 기억장치를 외부로 위탁한다. 나아가 그들에게 우리는 의미 있는 사건들의 구분과 선별부터 그들을 이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사색의 과정 전부를 위탁하기에 이른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리 세대만의 새로운 중력을 찾는다.
예를 들어보자. 참여, 공유, 개방의 기치를 걸고 태어난 웹 2.0의 시대의 개막과, 페이스북을 필두로한 SNS의 등장은 여러 부분에서 우리의 사색을 대행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어떤 사건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생각을 하기보다는 SNS나 인터넷 댓글을 보기 시작했다. '좋아요' 수가, '추천' 수가, '베스트 게시판'이 이 속도가 중요한 시대 속 우리가 의지하는 새로운 중력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중력은 사색의 과정을 거쳐 이야기가 되어주지 못하고, 단순한 사건들의 연대기로 해체되어버린다. 이렇듯 우리는 단순한 사건들의 나열로 점철된 점으로서의 사건 속을 살고 있고, 이를 이어서 하나의 선을 만들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방향을 찾기 위해 방황하고 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기에..
하지만 이러한 중력에 의지하는 것이 많은 현대인의 의미상실을 낳고 있는 상황에서 알 수 있듯, 이러한 새로운 중력은 우리의 삶에 방향과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해결책이 되어주지 못한다. 과거의 사람들이 의존하던 선조들의 '서사'와 달리 인터넷 속에서 찾은 질서는 그 방향이 너무나 쉽게 바뀐다. 구분되고 선별되었던 삶의 이야기는 네이버 메인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하루에도 수십번씩 바뀌고, 우리는 그 때마다 공허에 빠진다. 하지만 우리는 '삶은 의미있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목적을 가지고 목적지향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명제를 너무나도 강하게 배워왔다. 그래서 끊임없이 삶의 방향을 찾기 위한 새로운 질서를 '외부에 요청한다. (스스로의 삶을 곱씹어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일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하지 않기에 외롭고, 느리며, 힘을 잃는다.) 하지만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기존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 내 삶의 성취를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그 절망감은 권태로 이어지고 (그 질서를 통해 성취를 이뤄본) 윗 세대들은 그 권태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어느 때보다 세대 간의 갈등(꼰대담론으로 귀결되는)은 첨예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넘치는 권태와 관성적인 노력 속에서 생긴 공허한 간격을 극단적인 것, 자극적인 것으로 채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놀라운 것, 거듭하여 갑자기 새롭게 휘몰아치는 것, 충격적인 것'을 향한 중독에 빠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이기에 우리는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 질서는 기존의 질서와는 그 방향이 다르다. 하이데거는 '사건 사이의 연속성을 잃은 '역사의 종말'이라는 임박한 위기에 맞서서 강력하게 역사를 요청'한다. 하지만 그가 이야기하는 역사는 기존의 신학적이거나 목적론적인 성격의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기를 강조함으로써 만들어지는 나만의 역사이다. 이제 사건의 의미는 내 주변을 흘러가는 사건들을 자기 중심적으로 엮음으로서 일정한 방향을 가지는 시간의 다발을 만드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방향을 정하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니다.
이제 세계에 빼앗긴 내 시간을 찾아와야 할 타이밍이다.
사실, 달리지 않으면 뒤쳐질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지만, 이 점으로 가득한 사회 속에서 그 누구도 삶의 방향을 명확히 정해준 적이 없기에 내가 멈춘다고 한들 나는 그 누구에게도 뒤쳐질 수 없다. 지극히 천천히 나의 삶을 들여다보고, '느린 것에 대한 긴 용기'를 가지고 차근차근 나의 역사를 만들어가면 그만이다. 현대인들이 빠져있는 깊은 권태는 어떤 사색도 갖지 못하는 맹목적인 활동적 삶의 이면이다. 권태를 잊기 위해 새로운 활동을 일으키면서 우리는 이 권태를 지탱하고 있다. 이제는 그러한 권태에서 벗어나 나 스스로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조금씩 나아가는 내 삶의 방향을 정하기 위해 잠시, 아니 어쩌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오래 쉬어도 좋을 것이다. 나만의 고민으로 오롯이 채워낸 내 삶이 쌓이고 쌓여 역사가 된다면, 그 역사에서는 나라는 사람의 향기가 진하게 배어나올 것이다.
"기다림은 특정한 뭔가가 올 것이라는 계산이 아니다. 오히려 기다림이 가리키는 것은 어떤 형태의 계산으로도 포착할 수 없는 것과의 관계이다. 머뭇거림 역시 우유부단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머뭇거림은 포획하고자 하는 모든 단호한 움직임에서 벗어나는 (쉽게 장악되지 않는) 것과의 관계이다. 즉, 그것은 '벗어나는 것' 속으로 들어가는 긍정적 흐름인 것이다. 만들어낼 수 없는 것 앞에서의 조심스러움에서 오는 느린 속도가 머뭇거림에 영혼을 불어넣는다. 사상가는 '이러한 흐름이 일으키는 바람 속'에서 참고 기다려야 한다. '바람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는 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