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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Quants. 2011. 스캇 패터슨 저
숨은 공로자들
우선, 이 책은 커뮤니티 내에서도 논란이 많은 책이다. 2008년 금융 위기의 주 원인 누군가에 대한 논란은 각종 뉴스, 칼럼, 심지어 영화에서 까지 그 의견이 분분하다. 오늘 소개할 책 『The Quants』도 그 중 하나이다. 이 책의 부제목만 봐도 이 안에 어떤 내용이 담겨있을지 훤히 그려진다. 세계 금융시장을 장악한 수학 천재들의 이야기... 퀀트란 그런 사람들이다. 고도의 수학, 통계 지식을 이용하여 투자 법칙을 찾아내고 컴퓨터로 적합한 프로그램을 구축해서, 이를 토대로 투자를 행하는 사람들을 퀀트라고 부른다. 필자의 책꽂이 한켠에는 '워렌 버핏의 투자 기법'이라는 작은 책이 하나 꽂혀 있다. 제목만 보면 거창한 투자 공식이나 비밀스러운 노하우가 들어있을 것 같지만, 정작 그런 내용은 없다. 다만 투자자가 지켜야 할 행동 양식이나 마음가짐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책 제목을 '살면서 알아두면 좋은 덕목들'로 바꿔도 크게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퀀트들은 정신 수양과는 인연이 없다. 그들은 전혀 예측할 수 없을 것만 같은 투기, 도박에서 조차 과학적 이론을 적용하여 승리하고야 마는 존재들이었다. 퀀트들은 금융 시장에서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수익을 빠르게 달성하기 위해 고도의 수리, 통계 기법과 슈퍼컴퓨터를 활용하였으며, 우리가 경영학 시간에 배우는 경영을 위한 기본적인 요인들, 예를 들어 종업원의 사기 진작이라던가 CEO의 덕목 등을 '도저히 알수 없는 것들'로 치부해 버리고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수학과 컴퓨터를 활용한 지극히 실용적인 투자 모델 개발. 이것 만이 퀀트들의 관심사일뿐 이었다. 1980년대 금융 시장은 마이크 밀렌과 같은 정크본드의 제왕들의 놀이터 였으며, 1990년대에는 조지 소로스와 같은 발빠른 헤지펀드 매니저들이 월가를 지배했다. 그리고 2000년 초, 퀀트들은 그들만의 투자모델을 통한 엄청난 승리를 자축하고 있었다. 이 책은 그 퀀트들에 대한 이야기 이다.
콜이냐 풋이냐
지금 내가 보고있는 이 회사의 주식이 세 달 뒤에는 오를 것인가, 아니면 내릴 것인가? 오를 거라면 당장 사고, 내릴 거라면 쳐다보지도 말아야 한다는 걸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여기에 재밌는 게임을 하나 더 만들어 보자. 이 회사의 주식이 오른다는 데에 배팅할 것인가, 내려갈 거라는 데에 배팅할 것인가? 전자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주식 거래라면, 후자는 주식 가격을 바탕으로 한 미래 변동성 예측 게임, 옵션이다. 가격이 오른다에 배팅하는 것이 '콜', 내린다에 배팅하는 것이 '풋'이다. 이 게임의 기원(?)은 의외로 투기적이거나 도박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광활한 미 대륙의 동과 서를 오가는 농작물 수송 열차를 떠올려 보자. 두 달 전에 보낸 쌀이 한 가마니당 10,000원 짜리였는데, 오늘 목적지에 도착한 그 쌀의 가격은 가마니 당 8,000원으로 떨어져 버렸다. 쌀의 시장 가격이 두 달 사이에 변해 버린 것이다. 쌀을 팔기로 한 사람도, 쌀을 사겠다고 주문한 사람도 난감해진 상황이다. 이런 경우 얼마에 거래할 인지 서로 사전 합의가 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난처한 상황을 헷징(Hedging)하고자 '선도 거래'라는 독특한 거래 형태가 탄생했다. 판매자, 구매자 둘 다 쌀 가격이 미래에 오른다, 또는 내린다에 대한 나름의 예측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물건을 보내기 전에 인수 가격을 아예 못박아 버리는 것이다. 쌀 값이 떨어져도 인수자는 정해진 가격에 사야하고, 쌀 값이 올라도 판매자는 정해진 가격에 팔아야 한다. 이처럼 선도 거래는 실물 거래를 하면서 시간에 따른 가격 변동성을 헷징하기 위해 탄생했으니, 지극히 합리적인 탄생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할 수 있겠다.
마찬가지로 주식 시장이 열린 이후에도, 1960년대 이전부터 워런트(약속된 기간동안 일정 수량의 주식을 일정 가격에 주식 또는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 채권으로 매입할 수 있는 권리) 처럼 변동성을 테마로 한 상품은 존재해 왔다. 초기에는 이 것의 가격이 오를 지 떨어질 지 예측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웠다. 하지만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일 수록 길만 잘 찾으면 떼돈을 버는 법. 아인슈타인에 상대성이론에 버금갈 정도로 투자자들에게 각광받았던 공식, 블랙-숄츠 옵션 가격 결정 모형의 탄생은 그 동안 보이지 않았던 광대한 금융 투자 세계를 직시할 수 있는 안목을 주었으며, 퀀트들의 주머니를 터질 정도로 채워주었다.
배보다 커진 배꼽
위험이 발생할 것을 대비하여 만들어진 것이 보험 상품이다. 주식 시장에도 보험 상품이 있다. 가격이 떨어지고 있는 포트폴리오의 위험이 계량화 되고 보험이 그것을 보호해 줄 수 있다면, 그 위험을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포트폴리오 보험'이 탄생한다. 포트폴리오 보험은 시카고거래소가 S&P 500지수에 연동되는 선물계약들을 거래하기 시작하면서 급성장하는데, 포트폴리오 보험을 개발한 투자사의 퀀트들에게 큰 수익을 올릴수 있는 기회였다. 퀀트들은 S&P 지수선물을 공매도(하락시장에서 가지고 있지 않은 일단 주식 등을 팔고, 나중에 떨어진 가격으로 주워서 시세 차익을 노리는 행위)함으로써 포트폴리오 보험을 그대로 따라했다. 만약 주식 가격이 떨어지면 더 많은 선물 계약들을 공매도 하도록 설계 되었는데, 이는 그들에게 엄청난 수익을 가져다 주었다. 하락 시장에 배팅한다는 것은 '비관'을 추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퀀트들은 자기들만의 확실한 '비관' 비전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슈퍼컴퓨터의 거래 시스템에 이식시켰다. 그리고 그 결과는 1987년 10월 19일 월요일 이른 아침, 거래가 채 시작되기도 전부터 기다리고 있는 맹렬한 매도 공세를 통해 나타나게 된다. 포트폴리오 보험 매도자들이 선물을 엄청나게 매도했고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주식 가격이 곤두박질 쳤다. 이 여파는 순식간에 전 세계로 번져나갔으며, 다음 날 주식 시장은 더 깊은 수렁으로 빠졌다. 그러다가 연준이 엄청난 금액의 돈을 주식시장에 쏟아 붓기 시작하면서 주가는 다시 상승세로 돌아섰다. 그리고 바로 이틀 동안 역사상 가장 빠른 상승세를 기록하게 된다. 이 상황을 우리는 '블랙 먼데이'라고 부르고 있다. 투기를 넘어선 확신에 찬 맹목적 이익 추구가, 가장 정교하다고 믿었던 주식 시장을 어떻게 헤집어 놓았는지 슬프도록 잘 보여준 사례이다.
박수 소리도 양 손이 만나야 난다.
2001년 무렵 부터 미국은 저금리 정책을 편다. 미국 국채는 매우 안정적이면서도 꽤 짭짤한 수익을 보장해주는 효자 상품이었는데, 당시 연준의장이던 앨런 그린스펀은 이를 탐탁치 않게 여겼나보다. 이 무렵 JP모건 같은 투자은행은 CDO(부채담보부증권)라는 것을 만들어 냈는데, 이게 저금리 기조에서 아주 괜찮은 투자 대안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CDO는 주택담보대출증권(MBS)을 모아서 만든 상품으로, 원래 Prime, 즉 주택담보 대출을 성실히 갚을 수 있는 사람들로만 한정하여 만든 대출증권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더이상 모기지(Mortgage)를 쓸 사람이 없어지자, 추가 고객을 확보해야하는 은행들은 주택담보대출을 갚을 능력이 떨어지는, 이른바 Sub prime에게 집중하기 시작하고...모든 재앙의 씨앗이 탄생한다. CDO가 전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은행들은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머릴 쥐어짜야 했다. 쥐어 짜는 도중에 미쳐버렸는지 결국 돈 한푼 못버는 사람들에게도 주택담보대출을 해준다. 은행도 완전히 미치지는 않아서, 무일푼인 사람에게 대출을 해주는 대신,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을 담보로 잡았다. 1가구 1주택이 당연시 되었기에 주택가격은 계속 상승하고 있었고, 설령 대출을 못갚아도 집을 가져가면 되었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이 시기에 퀀트들은 CDO의 CDO(합성 담보부증권이라고 쓰고 괴물이라 읽는다.)를 만들어 내고 신용 부도 스왑을 만들어내는 등, 뽀글뽀글 올라오는 거품을 잠재우기 보다는 거기에 퐁퐁을 제대로 뿌려버려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2006년, 주택 가격의 거품이 정점을 찍고 슬슬 빠지기 시작하자 그동안 전 세계에 심어져 있던 재앙의 씨앗이 발아하기 시작했다. 퀀트들이 예상했던 것과는 반대로 시장이 흘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담보물 가격이 곤두박칠 치자 대부분의 채무자들은 디폴트를 선언했다. 그러자 CDO의 수익률은 마이너스로 돌아서게 되고, 그 만큼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이 공중에서 증발해 버렸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자 투자자들은 돈을 다시 회수하기 위해 뛰어다녔고, 대부분의 자산을 CDO로 가지고 있던 몇몇 대형 은행들은 패닉에 빠졌다. 지나친 낙관론이 가져온 방자함과 이익 실현을 위해서라면 물불 안가리는 천재들이 만나 환상적인(?) 콜라보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들은 벌을 받았을까?
금융 위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빅 쇼트'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대사들을 보면 '아... 세상이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미쳐 돌아가는 구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을 것이다.(안보신 분들을 위해 스포는 자제 하겠다.) 물론 금융위기라는 것이 100% 퀀트들만의 잘못은 아니다. 이들이 활개 치도록 놔둔 감시 기관, 그리고 스스로 거품이라는 것을 인지 하지 못한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어찌 되었든 슬픈 것은, 금융 위기의 여파는 너무나도 비참할 정도로 현실적이어서, 아직도 우리는 그 충격 속에서 제대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쫓겨났고 전 세계의 경제가 침체되었다. 연일 뉴스에서는 월가의 은행들을 규탄하는 시위를 보여주었으며, 투자 은행에 인력을 조달하는 MBA학교들은 지원자의 윤리관을 필수 평가 항목에 넣으면서 소 잃은 외양간을 고쳐나가려 하고 있었다. 이를 보면서 사람들은 '앞으로 절대 이런일이 발생 하지 않도록 정신 똑바로 차려야 겠다.' 라고 다짐했을 것이다. 그렇게 2008년 금융위기로부터 약 1년 정도가 지났을 무렵, 대학생이던 필자는 인터넷 뉴스를 기웃거리다가 우연히 기사 한 줄을 읽게 된다.
"미국의 부동산 가격이 바닥을 치고 다시 오름세를 보여주고 있다."
사라지지 않는 욕망이 또 한번 천재들을 부르고 있었다.